차와 나/생각담기

인생은 바둑한판

매뚜기 2011. 7. 11. 11:50

 

인생을 살아가는데 '운명'이 있는가?

 

운명 [destiny]
출처: 브리태니커

숙명이라고도 한다.
인간의 의도나 일을 포함하는 우주 전체가 인간의 의지와 관계 없이 움직이기 어려운 궁극적 결정에 의해 규제되고 있다고 생각할 때 그 인지(人知)를 초월한 힘.
그것은 모든 사물을 지배하는 불가피한 필연의 힘이며, 누구라도 따를 수밖에 없고, 예측하기 어려운 절대적인 힘이다. 또한 운명은 명확한 목적의지를 갖는 합리적인 힘으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비합리적·초논리적인 힘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힘은 그 자체로서는 결코 운명이라 할 수 없다. 운명의식이 처음으로 인간에게 나타나는 것은 불가항력적인 일이 눈앞에 벌어졌을 때이다. 즉 불가항적인 일에 대처하기 위한 합리적 처리 요구에 따라 도출되는 것이 운명의식으로 굳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것도 극히 인간적인 심리현상으로서, 어느 시대의 사람들에게서나 찾아볼 수 있으며 일찍부터 운명은 신격화되어 신앙·숭배의 대상이 되었으며 또는 추상화되어 신학·철학의 주제가 되어왔다. 또한 이러한 힘 또는 법칙을 예견하기 위한 신탁·점성술·점 등 여러 가지 주술적 방법이 발달했는데, 한편으로 운명과 인간의지와의 길항(拮抗)은 그리스 비극을 시작으로 하여 고대부터 예술작품의 주제가 되고 있다.
운명과 같은 의미의 일로 '숙명'·'천명' 등이 사용되는데, 이들은 다른 문화권의 운명을 나타내는 말의 원래 뜻과 상당히 유사하다. 그리스인은 운명을 모이라(moira : )·아난케(ananke : 필연)·티케(tyche : 우연)라고 부르며, 라틴어에서는 파툼(fatum : 신의 의지)·포르투나(fortuna : 요행)라 한다(이것은 영어·프랑스어 fortune의 어원임). 독일어의 Schicksal, Geschick는 신에 의해 '부여된 것'을 뜻하며 영어의 destiny는 '사전에 결정한다'라고 하는 의미이다. 또한 아랍어에서는 카다르(qadar)가 이에 해당하여 '몫' 혹은 '신에 의해 미리 정해진 것'을 의미하고 있다.
이러한 어원적 고찰에 의해 알 수 있듯이 운명의 힘이 여러 가지 형태로 인간에게 다가올지라도 그것에 대한 인간의 이해에는 공통된 틀이 있어 그것이 운명관으로 정립되게 되는 것이다. 운명관의 제1형식은 숙명론이다. 이것은 운명의 힘을 필연적인 것으로 보고 인간의 존재 모두를 지배하고 있다고 하는 소박한 신앙으로 정립된 것으로, 종교적 혹은 철학적 형태를 띤다. 그것은 신 혹은 우주의 지배자의 의지에 따른 결정으로, 과거·현재·미래에 걸쳐 우주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규정한다. 따라서 숙명론에서는 개개 인간은 자신의 장래를 전혀 예견할 수 없다. 숙명론은 흔히 결정론과 혼동되어 사용된다. 그렇지만 결정론이란 모든 일은 각각의 원인에 따라 일정한 조건 아래서는 반드시 일정한 결과를 가져오도록 결정되어 있다고 하는 설이다. 따라서 때로는 예견이 가능하며 예외적 현상의 발생은 인정되지 않는다. 이와 같은 결정론이나 그에 대한 비결정론은 오히려 운명이 어느 정도 발전된 단계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運命(옴길운,목숨명)

①앞으로의 존망이나 생사()에 관()한 처지(). ②운수()와 명수(). 곧 인간()을 둘러싼 선악(), 길흉(), 화복() 등()의 온갖 것이 초인간적()인 위력()에 의()하여 조성()되고 지배()된다고 믿어지는 그 섭리. 전()하여, 일이 되어 가는 형편(便). 운수(). 숙명(宿). 명운()  

 

 

운명론은 한마디로 하자면 초자연적인 거역할수 없는 '신의 뜻'이라 말할 수 있다.

 

운명이란 있는가? 있다. 명. 하늘의 명이다. 그렇게 살아가라는 하늘님의 뜻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앞의 운자는 옴길 운(運)자이다.  운전의 주체는 누구인가? 바로 '나'이다. 명은 신의 뜻.. 살아가는데 어떻게 살아가는 것? 너가 운전해서 살아가라는 뜻이다.

그 너는 누구일까?  바로 진아(眞我)이다. 그 진아가 바로 신이며 창조주이다. 결국 신의 뜻으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은 한편의 잘 만들어진 연극이라 볼수 있다.

 

'나'는 '나'인것 같지만 실지로 나의 주인은 따로 있다. '나'는 의식과 무의식 집단무의식의 총체이다. 내가 생각하는 생각은 사실은 다른 누군가의 영혼(靈魂)에 의해서 지배될수 있다. 이 번되 망상의 헛된 생각에서 벋어나려면 진정한 나의 주인을

찾아야 한다. 그 나 진아(眞我)는 오직 마음에 청정하고 맑고 고요해야만 찾을 수 있다.

 

우리의 영(靈)은 우리가 연극을 하고 있는 상황을 잘 알고 있으며, 연극을 하는 연기자이다. 우리의 몸을 가지고 때로는

배고픈 걸인으로, 개기름흐르는 부자로, 정치 권력가로, 살인자로, 성자로, 영웅으로, 평범한 민초로, 온갓 군상의 모습을 가지고

연기를 하며 살아가고 있다.

 

왜? 연극을 할까?

 

사랑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사랑을 모른다.

배고픔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배고픔을 모른다.

생사이별을 격어보지 않은 영혼또한 그 번뇌를 모른다.

불교에서는 고집멸도라 하고 고통과 집착을 멸하면 도에 이른다 한다.

고통이 번뇌와 집착에서 온다고 한다.

번뇌는 5감에서 오는데, 사랑이나 물욕 번뇌 고통이 된다.

욕심이나 사랑에 집착에서 오는 고통을 버릴수 있을까? 사랑이 무언지 모르고 욕심이 무언지도 모르는 상테에서...

 

소설가가 소설을 쓴다.

사랑이야기다.

사랑의 아픔을 격어보지 않는 사람이 글을 썼다.

과연 이 글의 진정성이 있는가? 과연 이 글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수 있을까?

재미는 있을지언정 마음을 울릴수는 없다.

 

번뇌를 겪어보지 않고서는 번뇌가 무엇인지 모른다.

번뇌의 실체를 격어보지 않은 영혼은 번뇌를 떨쳐버릴수 없다.

 

그래서 하느님은 영적 성숙을 위해서 우리를 지구촌이라는 공간에 우리를 보내셨다.

학교다.

학교에서 배우는 것이다. 대체 사랑이 무엇인지, 고통이 무엇인지, 신의 사랑은 무엇인지 배우는 것이다.

그 중에 우리는 각자의 역할을 충실히 하는 배우이다.

 

연극의 4대 요소가 있다.

 

무대, 시나리오(작가), 배우, 관객이다.

 

지구촌이라는 무대.

신의 입장에서 쓴 시나리오.

몸을 가지고 생각하며 살고 있는 '나'라는 배우

그것을 바라보는 관객(하느님)

 

하느님은 진아 이면서 나의 주인이면서 시나리오를 썼다. 그렇게 살아라.

그리고 그러함을 조용히 바라만 보고 있다.

 

 

운명이란 있는가?

인생의 길은 무엇인가?

 

이게 바둑판이다. 좌우로 각각 19줄이며 19*19=361개 이다. 이중 정 한가운데에 있는 것은 무극(無極)이라 하여 공(空) 하다

정한가운데의 공한 점은 0으로 본다. 그리하여 바둑판의 총 점은 360개이다.

한가운데의 점을 뺀 나머지는 춘하추동과 춘분 하분등의 절기를 나타낸다. 굿이 말하자면 24절기와 72절후가 고스란히 바둑판 속에 녹아들어있는 것이다.

 

이제 바둑을 두기 시작한다. 어느점이던 시작을 하면 이 바둑판 전체에서 무엇이든지 할수 있다.

처음 어렸을적엔 무엇이든 될듯 하다. 어렸을적의 꿈은 대통령도 될수 있고 거상이 될수도 있으며 선생이던 무엇이던 맘대로 꿈꿀수 있다.

 

 

20% 30%를 두고 나면 점점 그 입지가 작아진다.

인생의 바둑은 물를 수 없는 아주 신중한 한수 한수이다.

 

처음엔 쉽게 둘수 있다. 바둑의 수가 많기 때문이다. 점점 집이 생기고 커질수록 둘수 있는 바둑의 수는 적어진다.

이때부턴 꿈과 목표는 작아지고 현실화 된다.

이미 70% 이상을 두고 나면 더더욱 앞으로의 수는 적어진다.

 

 

 

백돌을 잡았던 흑돌을 잡았던 내가 둔 수는 과거다. 그리고 지금은 한수를 두어야 하는데 선택의 기로에 남겨져있다.

바둑을 끝까지 두어야 하는데, 그 수는 점점 작아진다.

수많은 수의 가지를 사이에 두고 우리는 최선의 선택을 하여야 한다.

과거의 단 한수가 지금의 어마어마한 차이를 나타낸다.

마치 나비효과 같다.

무심코 둔 한수가 중간이나 막바지에 달하면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절채절명의 위기에 처하게 되고 집이 몰살

당할수 있다.

 

바둑판의 남겨진 수를 예측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다.

 

현대의 중요한 3금이 있는데

그 첫번째가 황금이요

두번째가 소금이요

세번째가 지금이다.

 

지금은 과거의 연속이요 미래는 지금의 연장선이다.

지금의 선택이 중요하지만

최선의 선택을 하려면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모두다 보아야 한다.

현재의 지금은 과거에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며 과거를 보면 앞으로 미래에 어떻게 행해야 할지를 알수 있다.

 

아무런 생각없이 현재만 보고 미래를 첨친다면 과거로 부터 배운 모든 능력이나 경험을 사용할 수 없다.

 

바둑에서 대마를 잡을려면 미리 미리 포석을 깔아두어야 한다. 단 한두개의 포석만으로도 대단한 효과를 낼수 있다.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다. 성공할려면 미리 준비 해야 한다.

 

로또도 사는 사람에게만 기회가 온다. 어느날 갑자기 복꿈을 꾸었다고 복권 사는 사람들에겐 쉽사리 기회가 오지 않을

뿐더러 되어도 작은 몫만이 돌아온다. 무슨 일이든 꾸준하게 미리 준비 하여야 만이 미래에 큰 일을 할수 있다.

 

운명은 정해져 있는가?

그렇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

 

무슨 말일까?

 

바둑의 수는 분명 정해져 있다. 이미 대국이 중간이상 진행이 되어버리면 앞으로 둘수 있는 바둑의 경우의 수는 눈에 보일정도로 정해져 있다. 이 수를 두면 이렇게 펼쳐질 것이고 저수를 두면 저렇게 펼쳐진다.

 

그런데 바둑을 두는 주체인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 에 따라서 그 판도가 완전히 달라진다.

 

 

양자 물리학에서 불확정성의원리를 설명하는 유명한 실험이 있다.

이른바 슈레딩거의 고양이 박스 실험이다.

 

 

 

상자 안에 고양이가 한 마리가 같혀있고, 그 상자안에는 독가스가 들어 있는 병이 있다. 병은 마개로 막혀 있고 병 근처에는 망치가 세팅되어 있다. 이 망치는 가이거 계수기와 연결되어 있어서 가이거 계수기가 작동을 하면 망치가 병을 내리쳐 독가스가 흘러나와 고양이를 죽이게 되어 있다. 계수기 근처에는 우라늄 조각이 놓여져 있는데 이 우라늄 조각의 붕괴는 순수한 양자적 사건이므로 언제 붕괴될지 예측할 방법은 없다. 일단, 우라늄 원자가 1초 이내에 붕괴될 확률이 50%라고 가정하자. 우라늄원자가 붕괴를 일으키면 가이거 계수기가 작동을 하고 그 결과 망치의 작동을 병이 깨지고 독가스가 흘러나와 고양이는 죽게된다. 이런 조건하에서 상자의 뚜껑을 당아 놓았다면 고양이의 상태에 대해 어떠한 결론을 내릴 수 있을까?이 상자에 고양이를 두고 5분이 지났다. 상자 속에는 어떤 세계가 있을까? 상자속에는 2가지의 세계가 공존한다.

 

고양이를 종이 상자에 가둔 순간부터 우주는 2가지의 우주가 생긴다. 하나는 고양이가 살아서 나올 우주

또하나는 고양이가 죽은 우주.

 

 

이게 양자물리학에서 시작된 평행우주론이다.

물질(고양이가 살아있는 우주)이 있으면 반물질(고양이가 죽은 우주)이 생긴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의 선택을 하면 또하나의 다른 선택을 한 세상이 생긴다는 것이다.

말도 안되는 이 이론은 오래전부터 증명 되었다.

 2011년 4월 미국의국제중이온가속기 연구소에서 반물질을 발견했다.

국제공동연구진 새로운 반물질 헬륨4 발견

http://www.ytn.co.kr/_ln/0115_201104251036585631

 

무슨 소리냐?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허상이란 이야기다

 

어짜피 허상인 세상인데 우리의 삶은 고통스럽고 행복하고 하는 우스운 연극을 행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바둑의 수는 정해져 있지만 우리가 선택을 함에 따라 그 운명의 수가 달라진다.

하여 운명을 운수(運數)라고도하고 운수 좋군이라는 말도 한다.

 

 

점쟁이들이 과거는 잘 알아 맞힌다. 다른 신령계의 영이 그 발자취를 알려준데로 알려 줄수도 있고. 영적 눈이 트인 사람이

지혜안으로 아카식레코드를 읽어내여 알수도 있으며 주역같은 공부를 하여 통계학적인 결과로서 알수 도 있다.

그러나 미래는 그 경우의 수를 보는 것일뿐 그 경우의 수가 많기 때문에 비슷한 결과를 알아는 낼지언정

정확한 것을 알기는 힘들다.

가장 비슷한 경우의 수를 예측할수 있다.

하여 미래를 점치는, 미래를 보는 예언가의 눈은 정확한 것이 아니다. 예측일뿐.....

완전한 도통을 하면 알수 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완전히 알수 있는 것이다.

대오각성을 하면 모든 현상의 본질을 알수 있다.

큰스님이 무슨 예언하는 것을 본적이 있는가?

대오각성한 현자들은 많이 있다 하지만 그들이 이야기 하지 않는 이유는 입밖으로 꺼내는 순간 천기가 흐트러져

신의 뜻을 거스르기 때문이다.

 이세상의 모든것이 부조리하고 톱니가 빠진듯이 미친듯 돌아가는 듯하지만 사실은 모든 현상이 톱니바퀴보다 더

정확하게 맞물려 돌아가고 있다. 이것이 바로 조화이다.

미래를 보는 예언가의 예언은 이 조화를 깨트려 변화를 일으킨다.

 

만일 어떤 예언가가 화를 면하게 해줄 예언을 했다면 그 댓가는 반드시 그 예언가에게 돌아가게 되어있다.

또는 그 후손에 까지 미친다. 이것이 천기누설을 꺼리는 이유다.

요즘의 과학세상에 빠르게 요동치는 변화의 물결은 때가 되어 정화기가 오는 것일 뿐 막판에는

모든것들이 원시 반본 하게 되어있다.

봄이가면 여름이 오고 여름이가면 가을 겨울이 와 다시 꽃피는 봄이 오는 것일뿐이다.

 

당신의 운명이 있는가?

있다.. 아주 여러길이다. 가야하는 목표점인 서울은 분명 있다. 가다가 돌아서 갈수도 없거니와 가다가 멈출수도 없다. 끝까지 완주

해야만하는 명이다.

 

 고속도로 가던 국도로 가던 가는 길은 도착점은 하나다.

국도가 아닌 논두렁으로 갈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운명의 길은 도로아닌 곳에서는 차를 끌고 갈수 없듯이 정해져 있다.

운명의 길은 잘 나있는 도로 같다.

지름길로 가던 험난한 길을 가던 고속도로로 가던 자신의 선택이고 자신이 끌고가는 차(運)다.

이미 뚫려있는 길이 바로 명(命)이며 가는 방법이 운(運)이다.

 

도통군자는 이 운명을 자기 맘대로 변화시킬수 있다. 왜냐? 미래를 점칠수 있기 때문이다.

이수를 두어 이길을 간다면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안다.

저수를 두어 저길을 간다면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안다.

이수 저수 수많은 수를 두어도 길이 나오지 않는다면?

만들수 있다. 이게 변화다.

인생이라는 연극에서 작가가 되는 것이다. 작가가 되어 자기 맘대로 주무를수 있다.

 

영화를 한편 추천한다.

 

 

2010년 미스터 노바디

 

당신은 바둑을 두고 있다. 흑돌을 잡았나 백돌을 잡았나?  당신이 백돌을 잡았으면 흑돌은 당신의 업(카르마)이다.

그 카르마가 당신의 운명길에 자꾸만 홰방을 두고 있는 것이다.

 

 

'차와 나 > 생각담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바보와 정신병원  (0) 2012.03.20
행복은 어디서 오는가?  (0) 2012.02.21
운명의 길 과 그 기운.  (0) 2012.02.21
세상에서 가장 큰 고통은...  (0) 2011.09.13
마음이 고요해야 眞我를 볼수 있다...  (0) 2011.06.02